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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봉평 이효석 문학관

by 물가에서 2024. 7. 7.

봉평 메밀밭.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중학교 땐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처음 읽었을 때, 나도 이 부분에서 턱 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을 가졌었다. 정말 봉평면은 온통 메밀밭인지, 그리고 달밤에 보면 정말 소금을 뿌려놓은 듯 숨이 막히는지 알고 싶어졌다그래서 나는 대학 다닐 때,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소설의 무대인 봉평에 두어 번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매번 봉평에 갈 때마다 나는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어쩌면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이리라.

 

사실 봉평은 <메밀꽃 필 무렵>이 아니라면 누구 하나 거덜떠 보지 않을 시골 마을일 수 있다. 문학의 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봉평면 전체가 메밀밭이었으면 했던, 내 허황된 기대는 봉평을 찾았을 때마다 여지없이 깨졌다. 하긴 소설 속 1930년대 봉평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한국에도 이런 곳 한 군데 쯤은 소설처럼 간직해 뒀으면 하는 욕심이 매번 생겼다.

 

이효석 생가터. 원래의 생가는 헐렸고, 지금 있는 집은 다시 지어진 것이다.

 

작가의 후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가산(可山=이효석의 호)의 후기 문학세계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나마 그의 작품 중에서 <메밀꽃 필 무렵>은 <()>, <분녀> 등과 함께 재미있는 단편소설이라 여기는 편이다. 그 외에 그의 수필, 이를테면 <낙엽을 태우며> 같은 작품은 당시 시대 상황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 떨떠름한 느낌이다.

 

어쨌든 강원도 평창군은 효석의 고향 봉평에 그의 문학관을 세웠다. 이효석 문학관은 효석의 생가터 가는 길 무밭 언덕 위에 있다. 여기 무밭은 초여름이면 메밀밭으로 변한다. , 마을에서는 이곳에 이모작을 하고 있는 거다.

 

봉평은 옛날보다 자연미가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문학여행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찾아볼 만하다. 이 일대, 효석문화마을이라고 이름 붙은 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메밀꽃 필 무렵>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 한 느낌도 든다.

봉평장에서 대화장(지금의 평창군 대화면에 서는 5일장)으로 향하다가 발을 헛디딘 허생원이 풍덩 빠져 동이 등에 엎혀 건너던 흥정천에 옛날 널다리를 재현돼 있다. 그리고 이 개울 옆에는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을 보낸 물레방앗간도 있다.

 

이효석문학관에서 내려다본 효석문화마을. 무밭이다.

 

봉평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흥정천을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맨 끝에 이효석 생가터가 있다. 효석 생가터는 말 그대로 생가터일 뿐, 옛집의 모습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집 안방 문을 열어젖히면 지금도 효석이 작품을 구상하고, 원고지에 한 줄 한 줄 소설을 써 내려가고 있을 것만 같다.

 

효석의 생가를 둘러본 후에는 다시 봉평면 쪽으로 걸어내려 가보자. 길 좌우에 메밀밭이 조성돼 있다. 그러나 여름 초입에 여기를 찾는 사람들은 하얀 메밀꽃 대신 시퍼런 무청을 봐야 한다. 아마 봉평으로 관광을 오는 외지 사람들이 보기 좋도록 메밀밭만 가꿔서는 주민들의 생활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이 되기 전까지 이곳 주민들은 이 땅에 무 농사를 짓고, 메밀은 7월쯤 파종한다. 이곳 주민들의 삶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메밀꽃 필 무렵'의 대본. 이효석문학관 안에 있다.

 

효석의 생가터에서 남안교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주차장이 보이고, 주차장 너머 언덕 위에 이효석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안에는 효석의 일대기가 진열돼 있다. 여기에는 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할 당시의 봉평장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특히 이 안에는 효석의 유품과 초간본 책, 그리고 이효석의 작품이 발표된 당시의 잡지와 신문 등이 전시돼 있다.

 

한국 문학계에 이만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 중 제대로 된 문학관이 몇 없는 마당에 이정도 규모의 이효석문학관은 결코 사치스럽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2,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한 번 둘러 볼 만하다.

 

2006/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