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중학교 땐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처음 읽었을 때, 나도 이 부분에서 턱 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을 가졌었다. 정말 봉평면은 온통 메밀밭인지, 그리고 달밤에 보면 정말 소금을 뿌려놓은 듯 숨이 막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대학 다닐 때,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소설의 무대인 봉평에 두어 번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매번 봉평에 갈 때마다 나는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어쩌면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이리라.
사실 봉평은 <메밀꽃 필 무렵>이 아니라면 누구 하나 거덜떠 보지 않을 시골 마을일 수 있다. 문학의 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봉평면 전체가 메밀밭이었으면 했던, 내 허황된 기대는 봉평을 찾았을 때마다 여지없이 깨졌다. 하긴 소설 속 1930년대 봉평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한국에도 이런 곳 한 군데 쯤은 소설처럼 간직해 뒀으면 하는 욕심이 매번 생겼다.
작가의 후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가산(可山=이효석의 호)의 후기 문학세계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나마 그의 작품 중에서 <메밀꽃 필 무렵>은 <돈(豚)>, <분녀> 등과 함께 ‘재미있는 단편소설’이라 여기는 편이다. 그 외에 그의 수필, 이를테면 <낙엽을 태우며> 같은 작품은 당시 시대 상황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 떨떠름한 느낌이다.
어쨌든 강원도 평창군은 효석의 고향 봉평에 그의 문학관을 세웠다. 이효석 문학관은 효석의 생가터 가는 길 무밭 언덕 위에 있다. 여기 무밭은 초여름이면 메밀밭으로 변한다. 즉, 마을에서는 이곳에 이모작을 하고 있는 거다.
봉평은 옛날보다 자연미가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문학여행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찾아볼 만하다. 이 일대, 즉 ‘효석문화마을’이라고 이름 붙은 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메밀꽃 필 무렵>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 한 느낌도 든다.
봉평장에서 대화장(지금의 평창군 대화면에 서는 5일장)으로 향하다가 발을 헛디딘 허생원이 풍덩 빠져 동이 등에 엎혀 건너던 흥정천에 옛날 널다리를 재현돼 있다. 그리고 이 개울 옆에는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을 보낸 물레방앗간도 있다.
봉평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흥정천을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맨 끝에 이효석 생가터가 있다. 효석 생가터는 말 그대로 생가터일 뿐, 옛집의 모습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집 안방 문을 열어젖히면 지금도 효석이 작품을 구상하고, 원고지에 한 줄 한 줄 소설을 써 내려가고 있을 것만 같다.
효석의 생가를 둘러본 후에는 다시 봉평면 쪽으로 걸어내려 가보자. 길 좌우에 메밀밭이 조성돼 있다. 그러나 여름 초입에 여기를 찾는 사람들은 하얀 메밀꽃 대신 시퍼런 무청을 봐야 한다. 아마 봉평으로 관광을 오는 외지 사람들이 보기 좋도록 메밀밭만 가꿔서는 주민들의 생활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이 되기 전까지 이곳 주민들은 이 땅에 무 농사를 짓고, 메밀은 7월쯤 파종한다. 이곳 주민들의 삶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효석의 생가터에서 남안교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주차장이 보이고, 주차장 너머 언덕 위에 이효석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안에는 효석의 일대기가 진열돼 있다. 여기에는 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할 당시의 봉평장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특히 이 안에는 효석의 유품과 초간본 책, 그리고 이효석의 작품이 발표된 당시의 잡지와 신문 등이 전시돼 있다.
한국 문학계에 이만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 중 제대로 된 문학관이 몇 없는 마당에 이정도 규모의 이효석문학관은 결코 사치스럽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2,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한 번 둘러 볼 만하다.
200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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