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소설 <하얼빈> ‘작가의 말’에서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고 적었다. 작가의 이 말을 나는 책을 사보기 전에 이미 전해 들었다. <칼의 노래>, <흑산> 이후 또 하나의 엄청난 역작이 탄생했구나, 생각했다.
어제(8월 14일) 집 근처 서점에서 나는 주저 없이 <하얼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하얼빈>에서의 김훈의 필체는 내가 늘 동경하던 그 김훈의 필체였다. 가능하다면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문장을 만드는, 건조하지만 속도감 있는 김훈만의 필체는 전작들처럼 힘이 넘쳤다.
그러나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하얼빈>을 읽은 후 뭔가 아쉬운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뭐랄까. 꼭 짚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직 덜 익은 자두를 한 입 베어 문 느낌. 덜 숙성한 질긴 광어회를 씹은 느낌. 김치찌개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덜 묵은 김치를 넣고 덜 끓인 김치찌개를 먹은 것 같은 더부룩함을, 나는 느꼈다.
물론 <하얼빈>은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소설임이 분명할 것이다. <하얼빈>은 작가의 전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김훈 식 글쓰기’의 백미를 보여준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를 붙잡고 대하(大河)를 관통하는 소설의 흐름, 역사에서 허구를 최대한 배제한 서사 전개, 그리고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이야기의 극적 압축 기법은 ‘김훈 식 글쓰기’의 백미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하얼빈>을 읽은 후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 중략 …)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는 ‘작가의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하얼빈>의 집필 의도가 정말 그런 거였다면 적어도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을 만나 거사를 실행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좀 더 친절했어야 했다. 우덕순이 채가구역에서 붙잡히는 장면이 생략된 것과 김아려와 그의 두 아들이 하얼빈에서 겪었던 일들을 스트레이트 기사처럼 처리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추측하건대 문학동네는 <하얼빈>을 너무 급하게 세상에 내놓으려 한 게 아닌가 싶다. 광복절이라는 상징적 날짜에 맞추기 위해 담당 편집자가 작가에게 탈고를 재촉했을 수도 있겠다. 판권에 표기된 <하얼빈>의 1판 1쇄는 2022년 8월 3일이고, 내가 산 1판 2쇄는 8월 5일이다. 출판사는 <하얼빈>을 단 이틀 만에 2쇄를 찍었다. 시쳇말로 초대박이 났지만, <하얼빈>은 ‘한국 문단의 벼락같은 축복’이 다시 찾아온 건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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