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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by 물가에서 2022. 10. 13.

작가의 숙명인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려면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나는 내가 만들던(지금도 만들고 있는) 낚시 월간지에 한때, ‘정치, 혹은 사회적 글쓰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20066월호부터 201510월호까지 10년간 나는 매월 1, 많으면 2쪽짜리 칼럼를 썼다. 당시 내 칼럼은 (대부분) 낚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당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썼다. 낚시잡지에 낚시 이야기가 아니라 뜬금없이 정치 이야기를 하고, 노동과 사회 문제를 끄집어냈던 것이다. 이 시기, 즉 내가 낚시잡지에 사회적 글쓰기를 한 시기는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고착화하던 노무현 정권 중반부터 이명박 정부를 거쳐 탄핵 정국 직전의 박근혜 정부 때까지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의 서평을 쓰면서 부끄러운 나의 글쓰기 이력을 장황하게 먼저 늘어놓는 까닭은 그때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 <동물농장>, <1984>로 잘 알려진 조지 오웰의 이 에시이집은 우리에게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자신의 정치적 좌표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오웰의 에세이 29편은 발표한 시기에 맞춰 순서대로 배열돼 있다. 이것은 그대로 오웰의 자서전이다. 삶의 순서는 그 뒤이지만 파리와 런던에서의 부랑자 생활을 그린 스파이크가 가장 먼저 실려있고, 제국주의 경찰 시절 겪은 자신의 정신적 참담함을 고백한 교수형코끼리를 쏘다같은 글이 차례로 등장한다.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 작가의 동기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나는 왜 쓰는가’ 292p)’하는 그는, 실제로 이 책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어갔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오웰은 교수형에서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보았다. 그러면서도 버마인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한 후 교도소장이 모두 나가서 한잔 하자는 말에 형무소 정문을 나서며 모두 큰소리로 키득거리고 껄껄 웃는다.

 

코끼리를 쏘다에서 오웰은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 ‘손에 소총을 들고 있는 그 순간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그는) 이해했다.

 

제국주의 경찰 생활을 통해 제국주의의 본질을 (천천히) 간파한 오웰은 이후 파리에서의 밑바닥 생활과 스페인 내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노동자 계급에 눈을 뜨고, 전체주의의 대항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를 모색한다. 이 시기 쓴 그의 칼럼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스페인 내전을 돌이켜 본다’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등에서 이 시기 오웰의 생각의 좌표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 본다에 적은 이 문구는 오웰이 노동계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드러낸다.

 

노동계급의 투쟁은 식물의 생장과도 같다. 식물은 맹목적이고 어리석을지라도 빛을 향해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것만큼은 알며, 끝없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고 나간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그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며, 이제 그들은 그런 삶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오웰의 정치적 이념이나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오웰이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목적(혹은 태도)이 무엇인지, 작가의 정치적인 글쓰기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주목했고, 특히 글을 예술적으로 쓰는방법론에 더 눈이 갔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 이후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나는 왜 쓰는가’ 297p)’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나는 왜 쓰는가’ 297p)’이라고 오웰은 말한다.

같은 칼럼에서 적힌 앞의 두 문장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297p)’이라는 단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그리고 오웰은 정치와 영어에서 자신의 정치적 글쓰기(혹은 다른 유형의 글쓰기든)를 예술로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고, ‘자신만의 영업비밀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1. 익숙히 봐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
4. 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5. 외래어나 과학 용어나 전문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작가 김훈은 어떤 인터뷰(아니면 자신의 다른 글-기억이 명확하지 않다.)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가능하다면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글을 쓰고 싶다.”

 

나는 간혹 현란한 수사나 장황한 형용사를 곳곳에 배치해서 한없이 늘어진 문장을 보면 글쓴이는 자신이 쓴 이 글이 말하는 게 어떤 건지 과연 알고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과거 내가 쓴 글들 역시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 그때 내가 <나는 왜 쓰는가>를 읽었더라면

 

 

<생각해볼 문제>

1. 글을 잘 쓴다는 것과 좋은 글을 쓴다는 건 같은가, 아니면 어떻게 다른가?

2. 정치적 글쓰기는 선동적이어야 하는가?

3. 흔히 일컫는 순수문학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