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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수경 『자연사박물관』

by 물가에서 2023. 12. 11.

 

<<자연사박물관>>. 이수경. 강. 2020.

 

21세기 한국 노동 가족의 현실과 '초록 엑시트(EXIT)'

 

최현숙(구술생애사 작가, 소설가)은 최근 한 공개 강연에서 가족이란 어쩌면 자연재해 같은 것이라는 말을 했다. 비약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말을 일종의 비극의 하마르티아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자신의 자유의지로 바꾸거나 없던 일로 물릴 수 없는, 일종의 운명적 비극의 시작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 뉴스 등을 통해 부모의 불화나 형제자매간의 반목이 부정적 결과를 낳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비극의 하마르티아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이 때문에 내 가정의 평화가 위협받고 심지어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리게 된다면?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 가정의 남성 가장이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된 후 회사로부터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다. 80년대 말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만난 그의 아내는, 복직을 위해 회사와 싸우고 비정규직 노동자로 재취업한 후에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해고와 재취업을 밥 먹듯 하는, 그를 지지한다. 그러나 삶은 현실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노동운동을 한다는 건 다른 한 사람은 오롯이 그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부부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된다.

 

따지자면 이 갈등의 원인은 198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포섭된 한국 사회가 노동자들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에 있다. 머리로는 가족 중 누구에게도 이 갈등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유무형의 폭력은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다.

 

이수경의 자연사박물관은 이런 갈등을 겪고 있는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이자 생존 분투기이다. 일견 노동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자연사박물관은 가족소설 카테고리에 넣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표제작 자연사박물관과 함께 7편의 단편 소설로 묶인 이 작품은 각각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엮여있다는 점에서 ‘21세기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건 아마도 지금 한국의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의 처지가 40여 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인식을, 많은 사람이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사박물관에는 3인칭 시점으로 쓰인 자연사박물관, 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 노블카운티, 카티클란-온 마을이 빛으로 연결된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고흐의 빛, 재이(在以))가 있다. 인생 이야기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이 섞여 있다.

 

작품을 주의 깊게 보면 3인칭 시점으로 쓰인 자연사박물관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을 한 가족의 이야기로 묶을 수 있고, 1인칭 시점의 고흐의 빛, 재이(在以)는 또 다른 가족 이야기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족 이야기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읽힌다. 각 단편이 그 자체로 더블이고, 단편 속 인물이나 배경, 사건 등이 더블이다. 자연사박물관/ 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그녀, 고흐의 빛/ 재이(在以)재이아빠이다.

두 가족 이야기의 한가운데 자리한 인생 이야기노블카운티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느껴지는데, 이 두 단편은 ’/‘그녀의 전사前史를 보여준다.

 

나는 자연사박물관, 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의 가족과 고흐의 빛, 재이(在以)의 가족을 더블로 읽었다. 작품에서 21세기 한국 노동자 가족의 현실을 보고, 작가가 하려는 말에 귀 기울여봤다.

 

 

자연사박물관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의 가족

 

그녀와 그의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는 단편 노블카운티인생 이야기에서 전사前史로 나온다. 그녀가 그를 처음 만난 건 87년 시위대에서였다. “둘은 거리에서 만나는 일이 더 많았는데, 최루탄이 터지고 도망치거나 연행되던 거리였고, 삐삐로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던 거리였다(노블카운티94).” 그리고 둘은 애인이 된 지 10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노블카운티95).”

 

그는 작년 겨울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게 운전면허증을 뺏긴다. 그리고 올해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된다. 음주운전으로 내야 했던 벌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돈인 손해배상 청구서가 그와 그녀의 가족에게 날아온다.

 

이런 일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한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자본이 노동조합의 합법적인 노동3(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악랄한 무기는 이른바 손배ㆍ가압류.

 

이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 된다. 그녀는 적금과 보험을 깬 돈으로 카드값을 막고 쌀을 샀으며, 아이들의 피아노와 방문 학습지 수업을 그만두게 한다. 고작 우체국 비정규직 상담직원으로 그녀가 받는 급여 70만 원이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전부다. 그녀는 결혼반지 두 개를 팔고 거리로 나오면서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린다(자연사박물관25).

 

그런 그녀가, 음주운전으로 면허증을 뺏긴 그를 위로하던 그녀가(자연사박물관10-11), 갑자기 달라진다. 그가 만든 노동조합의 사무장의 아내가 심장마비로 죽은 후의 일이다.

 

“승산은 있어?”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지금은 싸우는 수밖에.” 그는 단호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녀는 두려웠다. “실패하길 바라는 거니?” 두려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중략) “사무장의 아내가 죽었잖아.” “사고였어, 심장이 좋지 않았대.” “나도 폐가 나빠. 죽을지도 몰라.”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어.” “ 미안해 함께 추락하기 싫어.” 「자연사박물관」 31쪽.

 

그의 해고로 인한 그녀의 불안과 부부의 균열은 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에서도 나타난다. 비정규 계약직으로 다른 회사에 재취업한 그가 다시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할 때 그녀는 불안하고 두렵다. 그녀는 그가 노동조합을 지킬 수나 있을까 생각했고, 노동조합으로 지켜질 것이 있을까도 생각했다(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45-46).

 

주식회사 크라운은 그가 일하는 서부공장을 쪼개 라인별로 도급 준다. 같은 조합원이었던 박은 도장라인 공장의 대표가 된다. 공장이 쪼개지면서 하청공장의 노동자가 된 그는 이제 주식회사 크라운 서부공장 노동조합원으로 존재할 수 없다. 회사 측 대표들은 더 이상 노동조합과의 교섭에 나오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는 과거 함께 꿈꾸던 노동 해방의 이상이다. 그러나 그의 해고로 닥친 가정경제의 불안은 현실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대학교 2학년 딸과 노동인권 변호사를 꿈꾸는 외국어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그녀는 지난해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에 있는 딸과, 비록 꼴찌에, 여전히 그것을 꿈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고 싶다던 아들을 생각했다. 「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 60쪽.

 

이것이 지금 한국 노동자 가족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녀와 그는 그들은 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이었고, 아직은 어떤 공장도 떠날 수 없다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60)’한다.

 

 

고흐의 빛재이(在以)의 가족

 

뭐든지 척척 고치고 만들어내는 그의 손을 사랑했고, 그 손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빛나게 바꾸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는 불안해진다. 나는 재이아빠와 대학 시절 함께 읽던 러시아혁명사, 3세계 민중의 운명이니, 노동자여 단결하라따위의 책들을 고흐의 자화상 뒤쪽 깊이 밀어 넣는다(고흐의 빛130).

 

물론 나는 여전히 재이아빠를 지지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마음은, 재이아빠와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그때의 나의 마음과는 차츰 거리가 생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비교적 강한 연대의식이다.

 

다음 날에도 물이 차오르고 정전이 될지도 몰랐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춥고 하수구가 얼고 물이 역류해도 귀여운 딸 재이와 건강한 남편 재이아빠와 함께라면 행복할 것이었다. 「고흐의 빛」 118쪽.

 

언제까지나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사느니 차라리 노동운동가로 살아가는 것이 남편에게도 그의 아내인 나에게도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잘해봐! 그동안 다른 건 내가 책임질게. 「재이(在以)」 154쪽.

 

그러나 재이아빠의 해고와 복직 투쟁 과정에서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한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다.

재이아빠는, 폐자재 분쇄기에 한쪽 손이 분쇄되고 공장에서 해고된 방글라데시 청년 노동자 아불이 목을 맨 후, 노동조합을 만든다. 그리고 불과 한 달 후, 재이아빠와 노동조합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해고된다. 재이아빠를 비롯한 조합원들은 회사와 싸우는 과정에서 공장문을 부수었고, 그들은 업무방해 및 기물파손 손해배상 청구서를 받는다(고흐의 빛126). 재이아빠는 조용히 떠나면 소송을 취하해주겠다는 회사 측의 회유와 협박을 끝까지 견뎌보려 했지만 결국 무너진다.

 

더 항소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면 손해배상은 취소해주겠대, 회사놈들이. 여보, 나 그러기 싫어. 그런데 그러지 않으면…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두려운 거지, 그 돈은 두려운 거잖아. 어떻게 할 거냐고?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했니? 「고흐의 빛」 136쪽.

 

남성 가장의 해고는 자연스럽게 가족 생계책임자의 이전으로 나타난다. 이제 돈을 벌어야 하는 아내는 자녀 양육과 가족의 생계를 동시에 떠안는다. 그러면서 남편과 분열이 생긴다. 작품은 재이아빠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해고된 후 회사로부터 손배ㆍ가압류 소송을 당하면서 재이아빠와 연대하던 나의 마음에 분열이 생기는 것을 대화 형식으로 들려준다.

 

“소송은, 그러니까 재판은 승산이 있는 거야? 가능성은 있는 거지? 불법이 아니랬잖아. 그럼 문제가 없는 거지? 그러게 왜 공장 문을 부수고, 빌미를 주지 말았어야지! 지면? 소송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이 일억오천만 원은 어떻게 되는데? 「고흐의 빛」 131쪽.

 

복직 투쟁과 소송, 구속을 반복하는 재이아빠의 부재는 나를 열악한 생존 시장으로 내몬다. 그리고 나는 한때 재이아빠와 공유하던 노동자 정체성(계급성)을 버린다. 나는 이제 재이아빠가 아니라 재이에게 집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방문 학습지 아이들의 머릿수를 늘리며 돈을 더 벌어오고, 그러니까 생계? 아무튼 의기양양하게 책임지겠다고 했던 그 무언가를 책임지고, 몇 년째 회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습지 노조 주변을 얼쩡거리는 일도 없이, 나의 딸 재이가 안전하게, 얌전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었다. 「재이(在以)」 157쪽.

 

 

작품 속 아이들의 자아분열

 

경제주체로서의 남성 가장의 해고는 부부의 갈등과 분열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해고 이전의 (비교적) 안정적인 자녀 양육과 교육 형태가 무너지는 것으로 악화한다. 이런 계층 이동 사다리 붕괴의 공포는 주로 아내가 먼저 느끼고, 폐쇄나 분열의 형태로 자녀들에게 전가된다. 자연사박물관속 두 가족 이야기에도 이런 현상이 잘 나타나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고 싶다던 아들은 명문 외국어고등학교의 기숙사 생활하면서 원형탈모가 생기고, 느닷없이 다리가 꺾이며 주저앉는, 원인 모를 병에 걸린다(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 햄스터와 고양이와 토끼를 기르고 싶다던 여덟 살 재이(在以)는 손이 없는 소녀의 그림을 그리고, 열두 살 재이는 냉면 가위로 냉면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동시에 싹둑 자른다(재이(在以)). 아들은 집으로 돌아오면 밥을 먹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50). 재이(在以)다 식어 빠진 치킨을 계속해서 씹어대다가 우웩, 하고 토하, 미용실에서 매니큐어 뚜껑을 다 열더니 바닥에 몽땅 쏟아버린(재이(在以) 161).

 

해고와 복직 투쟁, 그리고 소송에 매몰된 그/재이아빠는 한 가정의 가부장적 지위를 상실한 후 아들/재이(在以)의 감정폐쇄와 자아분열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한다. 아들/재이(在以)의 감정폐쇄와 자아분열을 옆에서 함께 겪으며 그 이상으로 무너지는 건, 이미 정서적ㆍ경제적 피폐를 떠안고 있는 그녀/나일 수밖에 없다.

 

 

결론을 대신해서

 

자연사박물관은 노동가족소설이다. 인물과 사건 및 배경이 가부장적 가족 경제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는 아쉽지만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노동자 가족의 현실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작품은 특히 21세기 한국 노동자 가족의 현실이 40여 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진 게 없다는 걸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작품 속 노동자 가족이 벌어들이는 한 달 수입을 보면 알 수 있다.

 

최저임금 1,573,770원과 주간 연장수당과 주말 특근 수당과 얼마간의 상여금, 거기에서 건강보험과 고용보험과 국민연금과 소득세와 주민세를 공제한 나머지, 그가 가져오는 돈으로는 그들 네 식구가 살아갈 수 없다(「크라운 공장 노동자 가족」 60쪽).

 

이 대목은 우리에게 40여 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를 떠올리게 한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팔만삼천사백팔십 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 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이백삼십일 원이었다. 그러나 보험료ㆍ국민저축ㆍ상조회비ㆍ노동조합비ㆍ후생비ㆍ식비 등을 제하고 어머니 손에 들어온 돈은 육만이천삼백오십일 원밖에 안 되었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 힘. 2002)』「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210쪽).

 

앞서 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때와 지금의 한국 사회의 노동자 가족 처지가 비슷하다고 전제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여기서 우리는 가만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 노동자 가족의 처지는 40여 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기는 한 것일까.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40여 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때보다 훨씬 부자가 됐지만, 자영업자를 포함한 90% 이상의 한국 노동자들의 삶은 오히려 더 팍팍해졌다는 데에 공감하는 국민이 더 많을 것이다. 2023년 현재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지표가 이것을 증명한다. 지금 한국은 나 하나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198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후 한국의 노동시장이 급격히 왜곡된 탓이 크다. 이때부터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의 대량 해고와 노동의 비정규직화가 일상이 됐다. 이후 200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정규직-비정규직의 이분화된 노동시장마저도 다층적으로 쪼개졌다. 자본은 노동을 포섭대상과 배제대상으로 구분하고, 배제대상 노동을 다시 여러 갈래로 분열시켰다. 배달노동, 플랫폼 노동뿐 아니라, 쿠팡 물류로 대표되는 초단기 알바 등이 대표적인 배제대상 노동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도 계층분화가 일어났다. 같은 노동자 계급에서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걸 서슴지 않는다. 이런 노동자 정체성의 상실은 그들의 노동 계급성 상실이기도 하다.

 

자연사박물관은 데칼코마니 같은 두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한국 노동자 가족의 현실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가정경제 주체로서의 노동자 가장(남편이든 아내든, 혹은 자녀든)의 해고는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낳는다. 이런 가족 구성원의 분열은 결국 가족의 해체나 가족중심주의에 매몰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작품은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가족중심주의를 경계하면서 21세기 한국 노동자 가족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현실이 아무리 고달파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불빛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며, 그 방법은 노동자 계급의 연대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 작품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작가는 자연사박물관재이(在以)의 마지막 문단에서 그 길을 가리키고 있다.

 

긴 통로의 끝에서 초록빛 유도등이 반짝였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자연사박물관」 33쪽.

 

그들 중 누구든 밤꽃 냄새 가득한 밤길을 함께 걸으며 어떤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록 우리들이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재이(在以)」 170쪽.

 

작가는 자신의 첫 소설집 자연사박물관으로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내가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것은,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주노동자(아불)의 이야기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욕심을 내자면 자본계급과 노동계급 양쪽 모두에게서 배제돼있는, 이른바 파편화된 노동자(플랫폼 노동, 배달 노동, 초단기 알바, 프리랜서 등) 가족의 이야기도 기다려진다. 마지막으로 곽장영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아빠의 정리 해고

-곽장영

 

엄마 등은 따스하다 / 몰아치는 비바람도 어림없고 / 혹한의 눈보라도 끄덕없다 / 졸음이 다가서면 언제라도 / 눈감고 볼만 기대면 잠든다 // 엄마 등은 편안하다 / 나만 보면 안겨드는 / 멍멍이도 아래서 꼬리만 흔들고 / 나만 보면 꿀밤을 안겨주는 / 옆집 형도 머리를 쓰다듬는다 // 엄마 등은 어디든 간다 / 한바탕 울음이면 / 과자 사러 가게에도 가고 / 콧물 묻은 칭얼거림이면 / 동네 한 바퀴 산책도 간다 // 엄마 등은 배부르다 / 돌아앉으면 / 엄마 젖이 입안에 가득하고 / 작은 손짓에도 / 세상 모든 것은 내 입으로 온다 // 엄마 등이 / 갑자기 차가워 불안하다 / 갑자기 흔들리고 배고프다 / 엄마 등의 불안은 / 어디서 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