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총합, 그게 무엇이든 내가 안아줄게
일주일 전이었나.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가던 날 아침,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저 교회 앞까지 아내를 태워다 준다.) 무심코 튼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저는 소설은 읽지 않아요. 그건 작가가 머릿속에서 막 꾸며 쓴 거잖아요. 대신 저는 수기나 에세이를 좋아해요. 그 사람의 이야기, 우리의 삶이잖아요.”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진행자의 말의 요지는 대충 이런 거였다.
“이분, 소설을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네.”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그저 취향 아닐까.”
아내가 말했다.
취향… 이라고 하기에는 소설에 관한 심각한 편견을 가진 사람이 꽤 있구나, 생각했다.
나는 『너의 총합』을 두 번 읽었다. 작가에게 책을 받은 그 날은 숨도 쉬지 않고 읽었고, 어제(12/31)와 오늘(1/1)은 꼼꼼히 한 번 더 읽었다. 해인사 가는 길 가야산 자락의 작은 마을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커피가 쏟아져 책을 적셨다. 젖은 책을 닦아가며 마저 읽었다.
이수경의 두 번째 소설집 『너의 총합』은 그의 첫 소설집 『자연사박물관』의 확장판이라는 게 내 느낌이다. 작가가 붙잡고 있는 화두가 조세희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고, 더불어 작가는 이 책에서 홍세화도 불러냈다. 나는 이걸 읽으며 ‘깜놀했’다고 작가의 페북에 댓글로 남겼는데, 그건 이수경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지난여름 이 두 사람에게 천착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흔적이 나의 졸고 ‘문예 비평_조세희 『침묵의 뿌리』와 홍세화 『미안함에 대하여』’이다.
이수경의 『너의 총합』은 「어떻게 지냈니」, 「서문 밖에서」, 「연희북문」, 「이별」, 「선량하고 무해한 휴일 저녁의 그들」, 「나는 고인 눈물이다」, 「눈이 내리면 그들은-레티마이투에게」 등 7편의 단편으로 묶인 소설집이다.
여기서는 각각의 단편에 대해 일일이 내 생각을 적지 않기로 한다. 그럴 능력도 없고…. 나는 그저 이 책에 대한 내 느낌만 뭉뚱그려 여기에 적어본다. 작품 해설은 이 책의 뒷부분에 오길영 교수가 친절하게 덧붙여 놓으셨다.
표제 ‘너의 총합’은 작품 속 단편들의 제목 중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차례를 죽 읽으며 처음에는 ‘뭐지?’ 했다. 그러다가 「나는 고인 눈물이다」의 마지막 문장에서 ‘아, 이거였구나’ 깨달았다.
나는 과거의 나의 총합이다.
준이가 쓴 마지막 문장이었다.
「나는 고인 눈물이다」 160p
작가는 작품 말미 <작가의 말>에서 ‘두번째 소설집 『너의 총합』은 이 시대 청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쓴 소설들’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 작품은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우리 부모 세대부터 우리 세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세대를 연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별」에서, 「선량하고 무해한…」에서, 「나는 고인 눈물이다」에서 우리는 우리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가슴 먹먹하게 읽을 수 있고, 「어떻게 지냈니」와 「연희북문」에서 우리 세대와 공감한다. 「서문 밖에서」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이들 각 단편은 세대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서늘하거나 때로는 아득하게 섞여 있다. 마지막 단편 「눈이 내리면 그들은-레티마이투에게」는 한국의 이주노동자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 혹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두 시선(아불을 보는 눈과 소라에게 향한 눈)을 성찰케 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도 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은 잔상이 있었는데, 바로 1991년 여름의 기억이다. 지방의 대학 본교와 뚝 떨어진 캠퍼스의 학생회관에서의 일.
그날 새벽 그 학생회관 옥상에서도 불덩이 하나가 땅으로 툭 떨어졌었다. 그때 그 새벽 학생회관 3층에서 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원고를 쓰고 있었던가. 신문으로는 낼 수 없었던 그 일을 우리는 일보(日報)로 찍었던가. 급하게 기사를 쓰고 희뿌연 새벽 교문을 나가서 마스터 인쇄 집 셔터 밑으로 원고를 밀어 넣었던가. 그렇게 한 장짜리 신문 오천 부를 찍어 뿌렸던가.
그 후 서울의 한 대학교 총장은 ‘죽음의 배후’를 언급했었다. 그때 나는 그 대학 총장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쓴, 우리에게 등을 돌렸던 두 시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후 30여 년이 지났고 사회는 많이 바뀌었지만, 한국 노동자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난쏘공』의 40년 전 영호는 지금도 12시간 맞교대 노동을 하고, 신애는 죽는다(「어떻게 지냈니」). 나는 이걸 한국 저임금 노동자의 현실과 중산층의 몰락으로 읽었다.
한국에서 학습노동자들은 더 앙상하게 말라간다. 적당한 바위에 붙어 정착한 멍게는 자신의 뇌를 먹어 치우고(「서문 밖에서」), ‘이제는 찬란한 잎도, 청년다운 가지도 잘려 나가 이 땅에 맞춰 심어진, 그런 나무(「나는 고인 눈물이다」 175p)’가 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나는 내 삶에 매몰됐지만 그때의 부채 의식은 씻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십 오륙 년 전 나는 (지금은 더욱 쪼그라든) 좌파 원외 정당에서 지역 활동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조세희가, 그리고 홍세화가 우리에게 ‘조세희와 홍세화’로 남아 있음에 깊이 감사한다.
어쩌면 작가 역시 나와 비슷한 부채 의식이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러면서 ‘지금 너의 총합이 무엇이든 내가 안아줄게’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감히 경의를 표한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족을 덧붙인다.
한때(아마 지금도) 가수였던, 그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똑똑 끊어지는 정확한 발음으로 자신의 말과 생각을 대중에게 전달한다. 50년 전 청바지를 입고 김민기가 만든 노래를 부르던 그는 대중 미디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이른바 대중 예술의 오피니언 중 한 사람이다. 지금도 그는 신문에 자신의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이러니 한국에서 소설이 팔릴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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