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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소설, 혹은 소설적 글쓰기로 얻을 수 있는 문학적 가치는?

by 물가에서 2024. 4. 21.

『 여자아이 기억 』 ( 아니 에르노 .  레모 . 2022)

 

 

 

글쓰기의 형용모순, 죽을 수도 있는 안식의 몸짓

-여자아이 기억(아니 에르노. 레모. 2022)을 읽고

 

여자아이 기억. 나는 이 책을 두 번 정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해력이 약한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게 무슨 이야기지?’ 했다. 분량으로는 장편인데 차례도, 중간 제목도 없는 소설. 도입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황한 넋두리는 내 책 읽기의 몰입을 방해했고, 1958년의 여자아이는 시간을 마구 넘나들었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은 후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왔다. 군데군데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손가락으로 연도를 더하거나 뺄셈을 하며 한 번 더 정독했다. 그제야 내 눈에도 1958년의 여자아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불온한(?) 아니 뒤셴느가 마침내 아니 에르노로 편안해지는 그 처절한 여정이.

 

작가는 1958년의 여자아이를 56년이 지난 후 의 글쓰기로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내 책을 쓰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106)’면서도 기어이 글쓰기라는 안식처에(202)’ 가 닿는다.

 

 

안식에 다다르는 위태로운 여정

 

 

이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1958년 여름의 S캠프. 그러니까 816일부터 912, 그리고 여름 캠프를 떠나기까지의 혹은 그녀의 기억이다. 18살의 여자아이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H와의 첫 경험(816~17일 사이의 밤) 뒤 그에게 버림을 받고 다른 남자들(자크 R까지 7)에게 윤간을 당한 일. 따돌림과 멸시. 다시 H에게 농락당한 911일과 12일 사이의 밤. 이것은 그녀의 욕망과 광기, 어리석음과 오만(16)’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작가는 를 통해 그 여름 S캠프의 여자아이를 마침내 구출해냈고(108), 2015428(아마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된 날일 것이다.) ‘는 마침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나고, 내가 바로 그녀라고. (109)’

 

작품의 후반부는 1958년 여름의 S캠프를 나온, 여자아이의 1958930일 이후의 2년을 그리고 있다. 아니 뒤셴느가 완전히 새로운 여자아이가 돼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물론 순탄치 않다. 에른몽 수녀원 여자 기숙사의 칸막이 방에서 여자아이는 여전히 H의 여자이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처녀막을 걱정한다. 우연히라도 H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여자아이는 콘크리트공을 사랑하다가 파국을 맞는 비올레트 르뒥을 읽으며 위안받는다. H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살을 빼고, 철학을 공부하던 여자아이는 시몬느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고, 루앙 사범학교에 입학(19602)하지만 곧 절망한다.

 

그러나 이 절망은 문학 공부를 위해 오페어 자격으로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새로운 희망으로 반전한다. 비록 비정상적인 식욕에서 해방되지 못했고, 생리를 하지 않지만, 여자아이의 영국 생활은 얼어붙은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중(179)’이었다. 그렇게 영국에서 인생의 일요일(188)’을 보낸 후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된 19608월 말이나 9월 초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때 가 쓴 소설의 도입부는 이렇다.

 

여자아이는 남자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고, 여자아이는 일어나, 도시로 떠난다. (200)’

 

작가는 이제 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캠프에서의 그 밤 이후 는 추락에서 추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60년 여름 혹은 초가을 우드사이드파크 공원 벤치에서 했던 의 최초의 글쓰기는 안식처였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글쓰기라는 안식처에 다다르기까지의 위태로운 횡단에 대한 이야기다(202). 2년 전 사랑을 향해 나아갔듯, 쓰려고 하는 책을 향해 나아가는 나는 이제 음식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10월 말 다시 생리를 시작한다(205).

 

1963년 여름, 23살의 아니 뒤셴느는 생틸레르뒤투베의 세자크 호텔에서 생물학적인 처녀성을 증명하고, 아니 에르노로 다시 태어난다.

 

 

주체성 회복을 위한 처절한 몸짓, 글쓰기

 

 

이글 서두에서 내가 언급한 장황한 넋두리는 타인의 법칙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세상의 모든 아니 뒤셴느들에게 작가가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갇혀 있는 타인의 법칙(혹은 과거의 이미지)에서 빠져나오려면? 작가는 작품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 길을 가리키고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지닌 무시무시한 현실성과 몇 년이 흐른 후 그 벌어진 일이 띠게 될 기묘한 비현실성 사이의 심연을 탐색할 것.’(211)

 

이 문장은 여자아이 기억을 한국어로 옮긴 백수린의 <옮긴이의 말>에서 좀 더 명확하게 읽힌다.

 

강요된 타자의 법칙 앞에 압도되어 자신을 상실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주체가 되기 위해 분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여자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216)

 

 

글쓰기를 마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조지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의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를 말한다. 오웰에 따르면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에게 여자아이 기억을 쓰게 만든 동기는 무엇일까. 아니 에르노는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왜 소설로 썼을까.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오웰식 글 쓰는 동기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굳이 끼워 맞추자면 아니 에르노의 역사적(개인사적) 충동인데, 그녀의 심장에 좀 더 다가간다면 숨쉬기 힘들 만큼 슬픈 조바심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흔이 넘은 노작가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에르노는 쓰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18)’는 절망도 했을 것이다. ‘책을 끝마치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106)’는 에르노의 이런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마찬가지로 책을 다 쓰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들부러워하지 않는(106)’ 에르노에게는 그가 부럽지 않다. (131)’ 글을 쓰고 있는 건 에르노 자신이니까. (131)

 

누구든 자랑스럽지 못한 자신의 과거사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다. 그것이 악몽 같은 것이거나 치욕적인 거라면 더욱 감추려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에르노의 것이 아닌 다른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작가의 어두운 전사(前史)를 보곤 한다. 그런 작품을 읽을 때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 작가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죽기보다 싫을 수 있는 일을,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그 일을, 나는 감히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만약 똑같은 개인사를 가지고 글쓰기를 한다면 에세이와 소설은 무엇이 다를까. 최근에 내가 읽은 이런 유()의 작품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최현숙. 문학동네. 2023)자연사박물관(이수경. . 2020)이다.

 

최현숙은 그의 산문집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에서 그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는 도둑년이었다>에서는 대학생 때까지 이어진 자신의 도벽을, <냄새나는 존재>에서는 여름이면 액취증을 숨기기 위해 겨드랑이에 소다를 바르던 자신을 적나라하게 그려 보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자위행위와 그 쾌락을 놀이의 즐거움에 빗대기도 한다(<섹스 관련 생애 맥락 몇 가지>).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직과 구속, 그리고 복직을 밥 먹듯 하는 (노동자 가장이 있는) 노동자 가족의 생존 분투기를 그린 소설집 자연사박물관역시 작가 이수경의 서사로 읽히는 작품이다. 특히 작품 속 단편 <인생 이야기><노블카운티>는 작가 가족의 전사(前史)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만 그 형식은 다르다. 전자는 산문(에세이)이고, 후자는 소설이다.

나는 최근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설에 대한 어떤 편견(혹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낀 적이 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차 안에서 무심코 라디오를 틀었을 때였다.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주고 음악을 틀어주던 진행자(DJ)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진행자 말의 요지는 이런 거였다.

 

저는 소설은 읽지 않아요. 그건 작가가 머릿속에서 막 꾸며 쓴 거잖아요. 대신 저는 수기나 에세이를 좋아해요. 그 사람의 이야기, 우리의 삶이잖아요.”

 

개인의 문학적 취향이라며 그냥 넘기기에는 내가 비록 나에게 그 진행자와의 인연은 터럭만큼도 없지만- 소설에 면목이 서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소설에 대해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겠구나생각했다. (이러니 한국에서 소설이 팔릴 리가 있나.)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 문학 양식이라는 소설의 사전적 의미가 사람들에게 이런 편견을 심었을 수도 있겠다.

 

 

나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유일한 서사

 

 

그런데 머릿속에서 막 꾸며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설가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는 천재이거나 그것은 소설이 아닐 확률이 아주 높다. 소설은 결국 사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SF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그 서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소설이 에세이와 다른 점은, 같은 사람 사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객관화하는 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소설, 혹은 소설적 글쓰기로 재구성한다는 건 내 이야기를 쓰되 남의 이야기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뜻이다. 내 아버지의 이야기, 내 어머니의 이야기,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독자는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런데 내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우리 가족이 아닌 온전히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건 용기라는 단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이 있어야 가능하다. 당신이 만약 그걸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1958년의 여자아이여자아이 기억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아니 에르노만의 여자아이였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삶에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각자의 이야기(서사)는 고유한 것이고, 필멸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고유한 서사는 공감으로 교류한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공감 능력이 그 이야기를 어루만져 빛나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