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離散 문학에 대한 소고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아동문학과 소수자 재현』(송수연. 문학동네. 2022)을 읽고)
얼마 전 타계한,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였던 작가 홍세화는 그의 칼럼 「난민, 왜 하필이면 한국 땅에」에서 ‘이 땅을 찾아온 난민은 난민이라는 거울을 통해 투사된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는 이 글에서 『레미제라블』의 가브로슈 소년을 언급하며, 그 소년이 우리 곁에 다가온다면 우리는 그를 환대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러면서 그는 ‘머리(의식)도 중요하지만, 머리보다 가슴(공감 능력)이 더 중요하고, 가슴보다 발(실천)이 더 중요하다’며,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으로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가슴이나 발은커녕 머리도 찾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탄했다.(1)
송수연은 그의 아동문학 평론 「다문화시대, 아동문학과 재현의 윤리」에서 한국에 온 난민이나 이주 노동자를 소재로 하는 아동문학에, 그리고 그것을 쓰는 작가에게 다른 길을 가보자고 말한다. 그는 송마리의 「올가의 편지」와 「엄마는 울지 않는다」를 소개하며 ‘어린이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아동문학은 타자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며.(2)
송수연의 이런 지적은 비단 아동문학에만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송수연의 말에서 ‘어린이’를 ‘이주 노동자’나 ‘난민’으로, ‘아동문학’을 ‘소설’로 바꿔보자. 이 말은 디아스포라 문학 혹은 이산 문학이라고 불리는 성인 문학(본격소설이든 장르 소설이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지침이다.
오늘 나는 다시 이수경의 단편소설 「눈이 내리면 그들은-레티마이투에게」를 펼쳐봤다. 한국에 온 지 십오 년이나 지난 마이투의 한국 이름은 ‘한소라’. 이 소설에서 ‘나’는 ‘이주민 인권 기획 르포집’ 제작에 필자로 참여하면서 소라를 만난다. 그리고 ‘나’는 놀랄 만큼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소라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팬데믹은 (중략) 어원으로 보면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모든 사람이 감염된다는 의미입니다.” Pandemic의 어원은 pan(모두) + demo(사람)이다. 소라는 그러나 ‘한국에서 이주민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재난 상황이 되면 알죠. 누가 가장 약자이고, 누가 먼저 소외되는지. 당시 우리는 팬(pan)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3)
이 소설에서 ‘나’는 “우리 마스크를 벗어볼까요?”라고 말하는 소라를 따라 자신의 마스크를 내리고 얼굴을 든다. 그럼으로써 ‘나’와 소라는 각각의 주체로서 서로를 바라본다.
한국의 이산 소설에서 우리가 벗어던져야 할 것은 송수연이 지적하는 ‘하얀 가면’만은 아닐 것이다. 홍세화가 안타까워하는 ‘GDP인종주의’라는 색안경도 그 가면과 함께 벗어 던져야 하지 않을까.
각주
(1) 『결 : 거침에 대하여』(홍세화. 한겨레출판. 2020.) 「난민, 왜 하필이면 한국 땅에」 188p.
(2)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아동문학과 소수자 재현』(송수연. 문학동네. 2022) 「다문화시대, 아동문학과 재현의 윤리」 104p.
(3) 『너의 총합』(이수경. 강. 2023.) 「눈이 내리면 그들은-레티마이투에게」 172~174p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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